너무나 평범한 주부에서 Amway 사업자로 변신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적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행복 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 하고 못한다 하고 하다 포기하고 못해 내는 것을 난 포기하지 않고 하고 있고 해 낼 것임을 믿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 Amway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도 Amway를 정확히 모르겠다
2014년 남편의 학회를 따라 독일로 가서 그 나라의 합리적인 system을 보고 한동안 독일처럼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회사가 없을지 고민하던 중 2016년 EBS “한국에 없는 부자를 찾아서”란 program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Amway 소비자로 제가 알린 파트너들이 성장하는걸 보면서도 내 삶에 만족한다며 스스로를 설득시켰고 월100만
마음에 루비를 안는 순간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 변화에 대한 부담감으로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고 가슴이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루비를 하고 싶다였다. 예전에 의류디자인 사업으로 정말 하루 하루를 전쟁처럼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에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고통스러운 질병이 또한 나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준 결과가 되었다. 뉴트리라
큰아이를 낳고 키우면서Amway 제품을 알게 되었고 아기 바디제품과 뉴트리키즈 디쉬드랍 등 몇 가지 제품을 꾸준히 사용하는 소비자였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스폰서님 만나서 내가 쓰고 있는 제품 속에 포인트와 캐시백 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번 만나 뵙고 “꿈”이 뭐예요? 란 질문으로 내가 꿈을 꾸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
결혼 후 두아이를 키우면서 저는 영어강사로 남편은 프로그래머로 서로 맞벌이를 하면서도 10년 후를 생각하며 뭔가 또 다른 수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해왔습니다. 프랜차이즈도 알아보며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때 가족으로부터 Amway 사업을 권유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내 일처럼 생각되지 않아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원데이 세미나에 초대받
대기업 가전회사의 연구원으로 회사를 다니고있는 남편, 저는 여성사업자로서 개인사업을 6년차 진행하고 있었을 때 저의몸상태는 심한 탈모와 몸 곳곳에 자주 나타났던 염증들로 응급실도 자주 갔었습니다 20년만에 만난 고등학교동창친구를 통해 전해들은 Amway제품은 저에게는 매우 생소한 제품이였습니다.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냥 관심없는제품이였습니다,친구가 저의 매우
며칠 전 신문에서 중국 알리바바 마윈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미국 디트로이트 중소기업 포럼에서 그는 “어마어마하게 비싸거나 갓 나온 신제품을 사들이며 자랑하던 시대는 지났다. 사람들은 여러 활동에 참석하면서 친구들과 웰빙 정보를 점점 더 나누고 싶어한다. 건강한 기분을 향해” 우리는 이미 홈미팅을 통해서 친구들과 웰빙정보를 나누고 있고 단지 건강한 ‘기분’만
20대에 내 두뇌를 그려보라고 한다면 성공, 꿈, 일이라는 것이 8할은 차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대기업을 10년 다니면서 남들보다 나은 급여를 받고 인정도 받았지만 그 속에서는 성장의 한계를 느끼면서 무언가를 계속적으로 찾았었던 것 같다. 성공세미나나 교육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다녀보았지만 어느 한곳도 나에게 어떤 것을 하라고 알려주지 않았고 결혼 후
2013년 처음에 Amway 사업을 이해하고 시작하는 제가 스폰서님께 했던 그 말“사랑이 가득한 그룹이고 싶습니다.”“핀업하면 다 그리 됩니다.”진짜 정답입니다. Amway사업이 이해하고 혼자 미팅다니고 홈미팅 진행하고 10core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파트너들과 함께 미팅 참석하고 홈미팅을 진행하고 함께 10core를 하며 행복한 Amway를 진행
결혼 전에는 직장생활 성실하게 열심히하면 잘살것 같았고 결혼 후에는 남편 내조 잘하고 아이들 교육에 신경쓰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는 일이 생겼고 그로 인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습니다. 큰아이가 아토피,비염,천식이 심해서 한 달에 병원을 얼마나 많이 다녔던지 힘들어하는 아이를 상태를 호전시키고 싶은 마음에 시중에
5년동안 육아에만 집중하고 세 아이들이 어린이 집에 가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오고 보니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고, 나 혼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벌이로 지금도 부족한데 세 아이들의 미래와 우리 부부의 노후를 생각해보니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자격증을 공부하고 취득하면서 약간의 위안을 삼고 있을 때 옆집 동생이
8년 전 우연히 알게 된 동생이 Amway 한다고 제품 필요하면 써달라고 해 15년 넘게 제품애용 했던 터라 알았다고 했습니다. 치약하나 가져다 달라고 했던 것이 인연의 끈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남편은 직장을 다니며 가게를 운영했고, 전 학교에 근무하고 있어서 Amway는 우리 부부가 할 일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잘 못알아 들었습니다.
저는 강원도 시골에서 아주 평범하게 자라며 인생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며 살아야 하는지 조차 모른채, 그냥 열심히만 살았던 아주 평범한 소녀였고 여자였고 엄마였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열심히 살면 내 삶은 나아진다는 기대감으로 20대와 30대를 일상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직장에서의 최선, 그리고 친구와 동업으로 한 인터넷쇼핑몰 또한 최선을 다해 이끌어
일찍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다는 현실에 부딪혔다. 꿈도 없이 그냥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을 때 지금 저의 스폰서님께서 Amway의 비전을 보여주시며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단순히 제품만 쓰는 소비자였는데 이 수단으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을 때 너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이라는 작은
유아복 매장을 하기로 결정할 때는, 백일을 일주일 앞둔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경험없이 시작한 자영업이 었습니다. 기대를 하고 시작한 자영업은 아니었지만, 자영업을 통해 많은 보상을 누릴 만큼 안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리하게 일을 하니, 건강에 이상이 생기게 되었고, 그때 가게의 단골손님인 지금의 스폰서님을 통해 Amway를 듣게 되었습니다. 가게
Amway는 제품을 소개받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돌이 지나면서 생긴 아이의 아토피가 낫길 바라며 부산외곽으로 이사를 갔지만 아이는 특별히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세제와 화장품을 만들어 쓰던 저는 생분해되는 세제에 감동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4살에 어린이집을 가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스폰서님의 따뜻한 후원으로 미팅장에 가본 저는
10년 전 우연히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 친구 엄마를 통해서 스폰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절대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잠깐 스치는 만남이었는데 2년이 흐른 뒤 남편의 고된 직장생활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다보니 뉴트리라이트 제품을 먹어보라는 주변사람들의 권유로 인해 연락이 되었던 것이 지금까지 감사한 인연으로 남아있고 제 삶까지 바뀌게 되었습니다. 변
쳇바퀴 도는 듯한 직장생활의 한계점을 느낄 무렵 저희 부부에게 너무나 생소한 Amway가 전달되었습니다. 신뢰가 있었던 대학선배가 한다는 얘기에 호기심이 생겼고, 이미 성공의 대열에 계신 업라인 스폰서를 뵙고 쉽게 사업을 결심했습니다. 안할 이유가 없기도 했지만,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직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큰 기대와는 달리
어느새 벌써 한해를 마감하는 8월이 되었습니다. 참 시간이 빨리도 흘러갑니다. 한해의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마무리와 더불어 다가올 새 회계연도를 준비해야 합니다. 올 한해를 멋진 성장으로 마감하시는 분들은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며 끝점을 찍기 위해 구슬땀을 흘릴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내년 회계연도를 멋있게 시작하기 위해 칼을 갈고 계실 것이라 생각됩
사람이 알고있다는 것이 진짜 제대로 알고있지 않고서도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Amway를 제대로 알고있지 못 하면서도 알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천멤버라는 명목으로 아무 생각없이 그저 필리핀에가서 봉사하고 오겠지하고 떠났던 비전트립이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레고 뜨거워집니다. 제 곁에 항상 계시는 조성윤